복숭아 알레르기 증상, 아기 몇살부터 먹을까?
종군위안부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큰 모순에 대해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종군위안부는 따를 종(從) 자를 쓰고 있으므로 일본군에게 강제적 착취를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본군을 따랐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종군 위안부라는 말 보다는 <일본군위안부>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하 내용은 ‘일본군위안부’라는 말로 대신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일본군위안부란 한마디로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대만 및 일본 여성을 가리킨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한국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일본군위안부’를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여기서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할머니들을 위해서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정신대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신대에 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 근로령이 내려지게 되면서 1944년 8월부터는 여자정신대 근로령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고 이는 남자를 대신해서 노동력 증대차원으로 일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일본군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일본군은 만주(滿洲) 침략 후 일본군의 중국인에 대한 강간사건이 빈발하여 현지인의 민원이 많아지고 군대 내에 성병이 만연하여 군 전력 유지에 차질을 빚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1932년경부터 군대위안부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여, 1937년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을 계기로 군대 전속 위안부집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였다고 문서상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종군위안부는 1920년대 말 정도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며 ('육군의 위안소는 일본 해군의 위안소 제도를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1932년 3월 이전에 이미 상해의 일본 해군에 의해 해군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19년부터 일본군이 부녀자들을 집단적이고 상습적으로 강간했었다는 기록으로도 미루어 짐작 해 볼 수 있다.
①국적 : 한국, 일본(이들은 본국에서 직업적 성 매매자 이며,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일본군들은 이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 외 러시아. 네덜란드 ,중국, 미국, 프랑스, 동남아시아 등 국적은 다양했다. 하지만 동원된 숫자는 단연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일본군들은 우리나라 여성을 대단히 선호했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지만. 자국의 여성들과는 달리 정조관념이 투철했던 우리나라여성을 더 선호했다는 것은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②연령: 11,12세에서 ~ 43세(가정을 가진 어머니도 징병됐다 한다.) 서울 연모 초등학교의 경우 징용된 여학생들의 명단이 실제로 나와 있다.(당시 초등학교 5학년)
③규모 : 우리나라에서만 20여 만명 정도로 추정됨.
일본 육군은 군인들에 의한 빈번한 강간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상해에 위안소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군위안소는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기거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공간이다.
위안소는 일본군문서상 '군위안소', '군인클럽', '군인 오락소', 혹은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다.
위안소의 크기나 형태는 일본군이 어느 시기, 어떤 지역, 그리고 어떻게 존재했느냐에 따라 달랐다. 위안소는 군부대가 주둔지에 신축하기도 하고, 원주민 가옥을 고쳐 이용하기도 했다. 부대가 이동하거나 전쟁 중일 때는 군인 막사나 초소, 참호, 군용트럭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위안소에는 위안부가 한 명이나 서너 명만이 있기도 했고, 많게는 수십 명이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보통 일본인 위안부와 한국인 위안부가 따로 생활 했다고 한다.)
군이 신축한 위안소의 경우에는 널빤지로 칸을 막아 방이 좁았으며, 방문은 담요로만 둘러쳐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한 평도 채 안되는 다다미 이었다. 이는 온도조절에 있어 불리하기 때문에 당시 위안부들의 고통을 짐작 할 수 있다. 위안소에는 일본군'위안부'와 관리자와, 그곳을 출입하는 군인이 있었다. 붙박이 위안소의 문밖에는 ㅇㅇ위안소라는 문패가 있기도 했다.
위안소 안에는 군인의 군표나 돈을 받는 접수처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삿쿠와 막 휴지를 주었다.(하지만 지급이 거의 안 되었다고 함) 또한 위안소 규정과, 위안부가 군인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프가 벽면에 붙어있었다.
또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또한 질 세척용 소독약(붉은 색)과 대야 등이 있는 별도의 세면장이 있는 곳도 있었고, 방에 단지 대야 정도만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군막사, 참호 등에는 아무런 물품 없이 오직 위안부와 군인만이 존재하기도 했다.
위안소는 크게 일본군의 군위안소 운영방식이나 이동 여부에 따라 그 형태를 나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군 직영, 군 지정 위안소 등으로 구분하는데, 군위안소 운영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것이 군 직영 위안소이다. 군이 감독 통제한 것만이 아니라 운영과 관리를 직접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군속이나 군고용인이 운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중일전쟁 초기나 전선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
군지정위안소는 군이 설립한 위안소나 민간 매춘시설을 지정하여 경영은 민간에게 맡기고 군은 감독과 통제만 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선 곳에 따라 현지 일본인에 의해 조직된 사업통제회, 기업연합, 실업 단을 내세워 이 시설의 책임자로 삼았다. 어떠한 군위안소라도 이를 관리 감독, 통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또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각 위안소를 둔 경우가 많았는데 위안소 운영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육군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위안소 사용을 시간대로만 구분할 뿐 장교와 사병간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비해 해군은 되도록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장교, 사병, 군속, 인부, 관리 등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 군위안소를 이동하는지 여부에 따라 붙박이식. 이동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붙박이식 위안소는 일본, 식민지, 일본군이 오래 주둔한 점령도시 등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설치되었다. 이동식은 중국 오지의 전쟁터와 같이 경계가 불안정한 경우에 설치되었다. 이동식 위안소의 위안부는 주거공간이나 식사 등 생활상태가 매우 열악하였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군'위안부'들은 대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사를, 초저녁부터 밤 7~8시까지는 하사관, 그리고 늦은 사건에는 장교를 상대하였다. 장교는 숙박할 수 있었다. 여러 부대가 같이 주둔한 경우에는 서로 요일을 달리해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군인 한 사람당 대개 30분이나 1시간 이내로 이용시간이 제한되었다. 군'위안부'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주말이면 훨씬 더 많았다. 또 위안소가 없는 지역에 파견되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전 인원을 상대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일본군이 많은 날이면 수박껍데기나 주먹밥을 먹었다. 주먹밥은 하루에 2개정도 먹었다고 한다.
군'위안부'들은 일주일 또는 2주일에 한번씩 군의나 위생병에게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 결과 합격된 '위안부'들만 군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주인들은 검사에 떨어졌어도 군인을 상대하도록 강요하였다.
군인들은 성병예방을 위하여 원칙적으로 삿쿠를 써야 했으나 삿쿠를 쓰지 않은 군인들도 많았다. 그 결과 '위안부'들의 상당수가 성병에 걸렸다. 그러면 606호 주사를 맞거나 중독 위험이 큰 수은으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성병이 심해지면 발견즉시 따로 격리되며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거나. 그 즉시 매장을 당하거나 처형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만약 임신을 할 시에는 태아와 자궁을 통째로 드러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힘들게 살아남은 피해여성들은 그 후 삶도 말할 수 없이 고단하였다.
찢겨질 대로 찢겨진 당시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여건은 그 어느 곳에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1950년 한국 전쟁을 치르며 받은 상처도 심각하였다. 어쨌든 이들은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고, 이웃에서도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늘 쉬쉬하며 숨어 지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드문 경우에 자식을 낳기도 하지만 잘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그들로부터도 부모로서의 대접을 받아 편히 산다는 경우는 거의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평생 독신으로 생활한 사람이 더 많았다.
피해 여성들이 가장 잘 하는 말씀이 있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른 보통 여성들처럼 혼인하고 아이 낳고 그저 그렇게 살아봤으면!” 결코 특별한 욕심을 내어 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아이 낳고 가족이 모여 살아볼 수 있었다면 하는 소박한 꿈, 그것이 그들에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오늘날 20여만 명의 일본군위안부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자료에 의하면 92년부터 한국 정부에 신고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는 2000년말까지 158명이었다. 이들 중 돌아가신 분이 40명가량 되고 실제 생존해 계시는 분은 이 당시 141명 정도였으며 그리고 최근인 2003년 통계를 보면 현재 전국에 128명의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시고 일본군위안부 전문기관인 <나눔의집 > 에는 2004년 2월 27일까지 9명의 할머니들이 살고 계신다.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이효재 ·윤정옥)가 발족하였고, 1991년 9월 18일 ‘정신대 신고전화’가 개설되었다. 12월 6일에는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등 3명이 일본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1992년 1월 13일 가토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관여를 최초로 공식인정하였다. 1992년 1월 24일 한국정부는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을 설치하고 2월 25일부터 6월 25일까지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접수한 결과 종군위안부 155만 명이 접수되었다. 7월 6일 가토 관방장관이 종군위안부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일본정부의 관여 사실은 인정하였으나 강제징집 사실은 부인하였다.
1992년 12월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군대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었고, 12월 9일에서 10일까지 일본의 전후보상문제에 관한 국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12월 25일 부산 거주 군대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1억 엔 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1993년 2월에 열린 제49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군대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었다.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고, 5월 18일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일본정부는 8월 4일 일본군 위안부 2차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하고 부분적 강제성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11월 국제법률가협회가 일본이 위안부문제에 대해 손해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는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1993년 12월 일본 정부는 옛 종군위안부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기 위한 ‘기금준비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원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매월 생활지원금이 50만원으로 인상되었으나, 대일 관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표명한 바가 없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여성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놓지 않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어느덧 우리가 광복을 맞게 된지 5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만큼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차츰 우리네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다.
이번 조사를 통해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만약‘이승연 누드 파문’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과연 대한민국 국민 몇 사람이나 일본군위안부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그들을 가슴깊이 위로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지 의문이다. ‘나눔의 집’에 들어오는 기부금과 위로방문을 오는 사람들도 이번‘이승연’파문 이후에나 급격히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제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과거 치욕스러웠던 역사를 돌이켜 보고, 현재 우리의 모습에 깊은 반성을 하고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종전 후 전후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본의 총리는 오늘날도 전범들을 위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속 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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